2002년 6월의 월드컵은 한국사회와 국민의식을 단기간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앙양시켰다데 이설이 없다. 그리고 그 주역은 '붉은 악마'와 '월드컵(W) 세대'였다. 그들은 태극기를 얼굴에 그리고, 몸에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표현하고 축제를 즐겼다. 붉은 악마는 철저한 상업주의 배격과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하는 신세대 응원단. 서울 광화문·시청의 40만명 거리 응원전을 주도하고, 경기장마다 붉은 물결을 이뤄낸 이들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4천700만 인파가 거리 응원에 나서서 곳곳에 해방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대대손손 갖추고 있던 신명이 밖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붉은 색조차 '빨갱이'라는 편견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자 우리의 열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따뜻하고 편안한 색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구 모 일간지에 실린 칼럼의 한 대목이다. 붉은 악마가 우리 사회에 던져 준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숙한 시민의식, 전세계에 자랑
특히 붉은 악마는 대한민국을 '질서강국'으로 다시 평가받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월드컵 기간중 우리 대표팀 경기가 열릴 때 길거리 응원에 나선 인파는 폴란드전 50만명에서 시작해 준결승전에는 700만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엄청난 인파가 몰리면서 안전사고 및 돌발사태의 위협은 어디에나 있었다. 경찰은 특별경계에 돌입하는 등 초긴장을 했지만, 우려할 만한 사고는 단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민들 스스로 분위기를 조절하고, 질서를 지키며, 쓰레기를 치우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온세계 언론에 고스란히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 경기장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환경부의 조사결과 경기장 쓰레기 양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열린 축구경기 때보다 평균 28% 정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자원봉사자와 90% 이상의 관중이 경기 전후에 경기장 전광판으로 안내되는 '클린업타임'에 쓰레기를 치웠고, 응원단들도 응원도구를 회수하고 주변 쓰레기를 치우는데 모범을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됐다.

'레드콤플렉스'를 '레드신드롬'으로
우리의 오랜 '레드 콤플렉스'를 '레드 신드롬으로' 바꿔놓았다는 평가도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붉은 색은 6.25 전쟁 당시 전 국토에 넘실거렸던 북한군의 붉은 깃발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공식적인 행사나 모임에서 사용해서는 안되는 '금기의 색깔'로 인식돼 왔다.
심지어 일부 계층에서는 '빨갱이'라는 어휘까지 사용하며 붉은 색에 대해 극단적인 적대감을 나타내기까지 했다. 이같은 적색 기피현상은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거의 사라진 것은 물론 일부 젊은 계층에서는 오히려 가장 선호하는 색상이 됐다. 인식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오히려 붉은 색이 국민의 화합과 협력심을 상징하는 '국색(國色)'으로 격상된 느낌을 줄 정도.

실제로 최근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상당수의 국민들이 붉은 색에 대해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갖지 않고 자연스런 친숙함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학계에서는 한결같이 "사회 구성원들이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이 사회 발전에 부정적인 요인이 되듯이 어떤 한 가지 색깔에 대해 배척심리를 갖는 것 역시 국민 정서의 균형이라는 면에서 우려되는 현상"이라는 지적과 함께 "월드컵이 한국축구의 4강진입이라는 차원을 떠나 국민의식이 한 단계 성장하는데도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민에게 이번 월드컵대회는 말 그대로 '축제 한마당'이었다.
지난 6월28일 한국갤럽이 전국 13세 이상의 남녀 636명을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월드컵으로 생활이 바뀌었다는 응답자가 61.5%에 이르렀다. 남자(57.9%)보다 여자(65.1%)에게 월드컵효과가 높았으며, 생활상의 변화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변화의 내용은 '활기차졌다'가 41.4%, '축구에 대한 관심 증가' 20.4%, '애국심 고취' 12.3%, '가족분위기 개선' 10.9% 순이었다.

그들에게서 미래를 본다
공식회원이 14만명인 '붉은 악마'가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본다.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패배주의나 냉소주의, 기성세대의 상처나 한(恨)의 응어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개성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의 취향도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와 문화적인 감수성을 내보였다.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뒤로 젖힌 세대가 많아졌고, 그들의 의식은 과거와 달리 부정(否定)이 아닌 긍정(肯定)이며, 인고(忍苦)가 아닌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월드컵은 그들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열정을 발산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했고, 그 신명은 국민전체로 번졌다. 그들이 보인 자발성과 질서의식은 전세계가 놀랐을 만큼 성숙한 국민상을 만들어 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월드컵 에너지'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 숙제로 남은 셈이다.